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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오카 나오테루・나오하루생가

메이지(明治)의 실업계를 견인한 간사이 재계의 중진

가타오카 나오테루

(1856~1927)

해군대주계 시대
(메이지19년)

만년의 가타오카 형제

안세이(安政) 3년(1856) 하마야마고(半山郷) 나가노(永野)의 향사(郷士)인 가타오카 마고고로와 노부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마고고로는 사재를 털어 긴노 활동을 했기에 가타오카 집안의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어린 시절부터 얌전하고 예의 바른 성격으로, 인근 서당에서 학문이나 검술을 배웠다. 14세경에는 집안에 도움이 되기 위해 서당에서 제자를 받아 공부를 가르쳤다.

메이지 6년(1873) 16살 때, 도쿄에서 공부하기 위해 상경했다. 공부하면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해군 학교에 진학, 생긴 지 얼마 안 된 회계 학교에서 보급과 회계를 공부했다. 이때쯤 해군 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시마무라 하야오(島村速雄, 훗날의 해군 원수), 다케다 히데오(武田秀雄, 훗날의 해군기관 중위・미쓰비시 조선 회장),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훗날의 해군 대신, 수상)와의 우정은 평생에 걸쳐 나오테루에게 큰 힘이 되었다.

해군성에 들어간 나오테루는 재능 중에서도 특히 어학 능력이 높이 평가 받아, 사이고 주도(西郷従道,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 해군 대신의 보좌관으로서 유럽에 파견되었다. 그후로도 3년에 걸쳐 프랑스에 주재하게 되었다. 이국 땅에서 함께 지낸 하라 다카시(原敬, 훗날의 수상)이나 센고쿠 미쓰기(仙石貢, 훗날의 규슈철도 사장), 이와시타 기요치카(岩下清周, 기타하마 은행 은행장)등과는 특별히 강한 유대감을 가졌다.
메이지 24년(1891) 프랑스에서 귀국한 나오테루는 해군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동지였던 고노 도가마(河野敏鎌) 내무대신의 비서관이 되었다.

메이지 26년(1893) 오사카부 서기관이 되어 오사카만의 개수나 상하수도의 정비에 그 수완을 발휘하여 오사카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그 수완이 높이 평가 받아 메이지 29년(1896)에는 일본은행에 들어갔다. 은행 업무 경험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견습생으로서 여러 실무를 경험한 후, 다음해에 일본은행 오사카 지점장에 발탁되었다. 나오테루가 오사카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 토대가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

메이지 34년(1901) 나오테루는 오사카 가스의 초대 사장이 되었다. 외국자본 수용이나 외국인 기술자와의 조정 등 해외 경험이 풍부한 나오테루의 실적이 평가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후에도 난카이 전철, 한신 전철, 히로시마 가스, 사카이 가스, 동양목재방부 등 많은 기업들의 사장이나 이사를 역임하여 오늘날의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기타하마 은행, 오바야시구미 등을 경영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의 영리와는 관계없이 동분서주하는 등, 간사이의 재계를 불황으로부터 보호한 고결한 인격은 재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카야마데라의 중진」이라 불리며 말년까지 큰 영향력을 끼쳤다.

재계를 은퇴한 후에는 하라 다카시의 강력한 추천으로 귀족원의 의원이 되었다가 쇼와(昭和) 2년(1927)에 72세로 영면하였다.

동자승에서 대신이 되기까지의 전기

가타오카 나오하루

(1859~1934)

젊은 시절의 나오하루

일본생명 창설 시의 사원(메이지 24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나오하루

쓰노초 나가노의 가타오카 나오하루 묘

안세이 6년(1859) 하마야마고 나가노의 향사인 가타오카 마고고로와 노부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나오테루와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지기 싫어하는 개구쟁이 소년이었다고 한다.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 때문에 구레(久礼)의 도린지(東林寺)에 맡겨져 4년간 동자승으로 살았다.

12살 때 고향에 돌아가 서당에서 공부하며 집안을 돕기 위해 일했다. 사가와(佐川)에서 헌옷을 사다가 행상을 하기도 했다. 14살 때 고치의 한코치도칸(藩校致道館)에서 공부하고 17살 때 고치도야학교(高知陶冶学校, 훗날의 사범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영어나 수학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재학 중인데도 불구하고 하마야마고 히메노노(姫野々) 소학교(현 하야마 소학교)에 부임했다.

메이지 13년(1880) 약관22살에 하마야마고 주산가손 연락회(半山郷十三ヶ村連合会)의 의장을 맡고, 다음해에는 현민유지연합의 대표로서 다니와키____(谷脇清馬)와 함께 상경한다. 고치현정에 대한 진정을 하기 위해 당시 참의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면회. 4시간에 걸쳐 논의를 벌였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이토는 “젊지만 사물의 이치를 잘 알고 있다. 다른 당의 생각을 잘 살펴보고 있으며 토론도 잘한다. 생각도 잘 잡혀 있어서 아주 감복했다”고 평했다. 이토에게 그 재능이 발견된 나오하루는 내무성 어용계로 명을 받아 관계에 들어갔다.

메이지 17년(1884) 공적 사적으로 나오하루와 친했던 나카이 히로시(中井弘)가 시가현 현령(滋賀県県令)에 취임함에 따라 시가현 일등속으로서 현청에 부임했다. 7개의 과장을 겸임했는데, 특히 위생 분야의 개선 및 발전에 공헌했다. 메이지 19년(1886)에 시가현 경본부장으로 승진했지만, 메이지 22년(1889)에 장래의 정치 활동을 대비하여 관계를 떠나기로 결의를 굳혔다.

관계를 떠난 나오하루가 뛰어든 것은 일본생명(日本生命)의 경영이었다. 히로세 스케사부로(弘世助三郎)로부터 신설된 일본생명의 경영에 대해 타진을 받은 나오하루는 자신은 부사장이 되고 사장에는 고노이케 젠에몬(鴻池善右衛門)을 맞아 들였다. 이후 십 년간 경영을 주도하여 일본생명을 일본 최대의 생명보험회사로 발전시킨 후, 고노이케로부터 사장직을 물려 받았다.
그후로도 일본창고 주식회사나 교토 미야코호텔, 나라호텔을 설립하고, 참궁철도(参宮鉄道), 간사이 철도 등 많은 기업의 사장도 역임하여, 형인 나오테루와 함께 간사이 재계의 중진이 되었다. 청일전쟁 후의 불황이나 햐쿠산주 은행(百三十銀行)의 파국으로부터 재계를 구하고자 정부와 재계 사이에서 힘써, 그 위기를 구하는 등 경제계에 큰 공적을 남겼다.

다이쇼 8년(1919) 젊은 시절부터의 숙원이었던 정치에 전념하기 위해 실업계의 직함을 내려 놓았다. 다이쇼 14년(1925)에 가토 내각의 상공 대신에 임명 받고 이어서 와카쓰키 내각의 대장 대신이 되었다.
세상은 쇼와 금융 공황이 시작되어 관동대지진의 재해어음관련법안도 처리해야 했으나 나오하루의 발언이 정쟁의 계기가 되어 책임을 물기 위해 사직했다. 그후, 입헌 민정당 고문이나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가 76세에 영면했다.